민주화운동의 '큰 산' 고 강신석 목사 8일 영면

사회
민주화운동의 '큰 산' 고 강신석 목사 8일 영면
문재인 대통령, 국민훈장 모란장 추서 .. 유족에 전달
  • 입력 : 2021. 02.07(일) 22:32
  • 배병화 기자
국민훈장 모란장에 추서된 고 강신석 목사. 고인이 생전에 민주화운동, 5·18 진실규명, 책임자 처벌 등에 헌신한 공로를 높이 평가하는 훈장이 조선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인의 빈소에 함께하고 있다.
[프레스존]민주화운동의 ‘큰 산’이었던 고 강산석 목사가 8일 영결식을 치르고 영면에 들어간다.

고 강신석 목사의 장례는 민주사회장으로 조선대병원 장례식장에서 발인 절차를 마친 후 국립5·18민주묘지에 안장된다.

문재인 대통령은 고 강신석 목사를 지난 5일 국민훈장 모란장에 추서했다.

고인이 생전에 5·18민주화 운동의 진실규명과 이를 위한 특별법 제정, 신군부 핵심 세력에 대한 단죄 등에 헌신한 공로를 높이 평가했다.

청와대 시민사회수석실 비서관은 6일 조선대병원 장례식장에 안치된 고인의 빈소를 조문하고 이를 유족에 전달했다.


[고 강신석 목사의 삶과 그 발자취]

고 강신석 목사는 종교, 교육, 통일 등 전반에 걸친 사회활동에 헌신한 광주지역 원로로 손꼽힌다.

1938년 8월 24일 아버지 강주원 목사와 어머니 명섬 사이에서 장남으로 광주에서 태어났다.

그래서인지 평소에도 ‘나는 광주를, 무등산을 누구보다 사랑한다’는 말씀을 자주 했다.

한 평생 광주를 위해 일하고 생을 마감하기 전까지 사랑하는 무등산 자락에서 살았다.

목회는 1963년 전남 해남 송석교회에서 시작했다.

2007년 스스로 개척한 광주 무진교회에서 ‘후배들에게 빨리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는 평소 소신대로 미리 자원하여 은퇴한 분이다.

고인은 1976년 목포연동교회에서 시무하시던 중 광주 양림교회에서 열린 노회에서 유신반대 성명서 낭독을 주도했다,

바로 이 일로 구속 기소된 후 재판에서 징역 3년 형을 선고받아 1년여 수감 뒤 특별사면 됐다.

이후 긴급조치로 4개월간 수감된 데 이어 1980년 5월 17일 예비검속 수배명단에 포함됐다.

한점 티없이 환하게 웃고 있는 강신석 목사

강 목사는 당시 5.18의 진실을 알려야겠다는 생각에 곧바로 서울로 상경했다.

여러 선교사들의 도움을 받아 활동하던 중 주한 독일대사 등을 만나 광주의 진실을 알리는 데 집중했다.

그 결과 신군부로부터 고초를 당하고 보안대에서 독방 신세를 지기도 했다.

이렇듯 고인은 1980년 광주민중항쟁에 이어, 5.18특별법 제정 투쟁 등 ‘민주주의와 민족통일, 인간 존엄성을 실현하기 위한 투쟁’을 벌이는 삶을 살았다.

특히, 김영삼 정권 시절 5.18 특별법 제정 백만 명 서명운동을 벌여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백만 명의 서명을 받아냈다.

결국 신군부 핵심을 재판정에 세우고, 두 전직 대통령이 중형선고를 받도록 큰 역할을 담당했다.

고인은 전두환 정권 시절 해외로 눈을 돌려 1984년 5월 12일 독일을 방문, 5.18 민중항쟁의 진상을 구체적으로 알리기 시작했다.

지칠 줄 모르는 의지와 투쟁으로 1988년 5.18 청문회, 5.18 기념일 지정, 망월동묘역의 국립묘지 지정 등 한국민주화운동의 푯대를 세우는 데 목회자로서의 사명을 다하는 데 앞장서왔다.

그분의 헌신이 어디 그뿐이던가. 1980년 12월 30일 제1회 ‘고난당한 자와 함께 드리는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2001년까지 무려 22년 동안 민주화와 통일운동에 헌신해 온 것은 물론, 옥중 양심수들에게 옷가지를 전달하는 등 옥바라지에도 최선을 다했다.

또한 미전향 장기수들이 옥중에 있을 때에도 그들을 돌봤다.

이들이 사회에 나왔을 때 사회에 적응할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주었다.

미전향 장기수들 중 북녘 땅으로 돌아가기를 희망하는 이들이 북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당국과 협의하는데 최선을 다하며 남북화해의 물꼬를 트기도 했다.

강 목사는 생전에 교육민주화에도 최선을 다했다.

1982년 1월 광주 YMCA 중등교사회를 탄생시키는데 무진교회가 그 산실의 역할을 했다.

더 나아가, 교육민주화 활동을 하는데 교회가 정신적 토대가 되도록 힘을 썼다.

이후 전교조의 탄생과 해직교사들의 뒷바라지도 그 분의 몫이었다.

전교조 합법화 과정에서 집회, 서명, 연대사업, 인적지원 등 교회의 사회적, 역사적 소명에 충실했다.

마침내 교육민주화와 전교조 합법화에 크게 기여한 공로로 2007년 참교육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우리나라 민주화와 평화통일 분야에 크게 기여한 점을 인정받아 제 25회 한신상을 수상했다.

5·18 알리다 옥고를 치른 강신석 목사

강 목사는 장애인 인권을 위해서도 마다하지 않았다.

특히 한국실로암선교회 이사장을 역임하며 시각장애인들의 복지에 관심을 갖고 시각장애인의 인권향상을 위해 애썼다.

또한, 광주 종교인 평화회의 상임 공동의장으로서 종교간 화해, 종교간 협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리고 이를 위해 일했다.

고인의 가정은 아버지 강주원 목사의 고향인 나주 방산(다도)까지 선교하러 온 타마자 선교사로부터 복음을 직접 받아들인 3대 목사 가정이다.

아버지 강주원 목사님, 아들 강의준 목사에 이르기까지 신앙을 기업으로 삼은 가정으로 잘 알려져 있다.
고인은 특히 신앙의 힘으로 평생을 살았으며, 마지막 순간에도 기도하고 찬송하며 할렐루야와 아멘을 외치며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신앙을 몸소 삶의 모습으로 보여줘 신앙인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고민하는 이들에게 좋은 귀감을 보여준 스승이요, 이 나라 이 겨레의 큰 어르신이다.


[故 강신석 목사의 약력]

1938.8.24. 광주광역시 출생
광주 대성초등학교 졸업
광주서중학교 졸업
광주고등학교 졸업
한신대학교 신학과 졸업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졸업
1963년 전남 해남 송석교회에서 목회 시작
1968년 무안 해제중앙교회 담임목사
1975년 목포 연동교회 담임목사
1978년 광주무진교회 담임목사
1989년 한국기독교장로회 전남노회장
1992년 광주기독교연합회(NCC) 회장
1992년 한국실로암선교회 이사장
1994년 광주YMCA 이사장
1995년 한국교회협의회 평화통일위원장
1998년 한빛고 이사장
1999년 5.18민중항쟁 제19주년기념행사위원장
1999년 민주개혁국민연합전국본부 대표
2000년 광주종교인평화회의 상임 공동의장
2001년 우리민족서로돕기광주전남 상임공동대표
2003년 5.18기념재단 이사장
2004년 조선대학교 이사장
2007년 광주무진교회 자원 은퇴
2007년 참교육상 수상
2019년 한신상 수상
2021년 국민훈장 모란장 수상

<가족 사항>
•사모 : 강혜영
•자녀 : 강의권 강의권 강의혁
•자부 : 김선미 장현숙 박민영
•손자 : 강정민 강정한 강정인 강정연 강 첨
배병화 기자 news@presszon.kr     배병화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