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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영
자유롭게 읊다
-김창흡(金昌翕, 1653 ~ 1722)
寂寂臨池坐
적적림지좌
고요한
못 가에 앉으니
風來水面過
풍래수면과
수면 스쳐
바람 불어온다
高林有病葉
고림유병엽
옛 숲
병든 낙엽 하나있어
一箇委微波
일개위미파
하나 주워
물결 위 띄워본다
김창흡(金昌翕, 1653 ~ 1722)
서울 출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자익(子益), 호는 삼연(三淵).
아버지는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이며, 어머니는 안정 나씨(安定羅氏)로 해주목사 나성두(羅星斗)의 딸이다.
이단상(李端相)의 문인이다.
과거에는 관심이 없었으나 아버지의 명으로 응시하여 1673년(현종 14) 진사시에 합격한 뒤 과장에 발을 끊었다.
백악(白岳) 기슭에 낙송루(洛誦樓)를 짓고 동지들과 글을 읽으며 산수를 즐겼다.
1681년(숙종 7) 김석주(金錫胄)의 천거로 장악원주부(掌樂院主簿)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아버지가 진도에서 사사되자, 영평(永平: 지금의 경기도 포천시)에 은거하였다.
『장자』와 사마천(司馬遷)의 『사기』를 좋아하고 시도(詩道)에 힘썼다.
친상을 당한 뒤에는 불전(佛典)을 탐독하여 슬픔을 잊으려 하였다.
그 뒤 주자의 글을 읽고 깨달은 바가 있어 유학에 전념하였다.
1696년 서연관(書筵官)에 초선(抄選)되고, 1721년(경종 1) 집의에 제수되었다.
이듬 해 영조가 세제(世弟)로 책봉되자 세제시강원(世弟侍講院)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임하고 나가지 않았다.
신임사화로 절도에 유배된 형 창집이 사사되자 지병이 악화되어 죽었다.
배진희 기자 news@presszon.kr 배진희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