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웅인 / 삼성한의원 원장

제다(制茶)

謝逸庵居士鄭君奇茶
사일암거사정군기다

일암거사 정분이 차를 보내와 감사하며

- 이규보(李奎報, 1168 ~ 1241)


1.
芳信飛來路幾千
방신비래로기천

향기로운 소식
몇 천리를 날아 왔나

粉餞糊櫃絳絲纏
분전호궤강사전

하얀 종이 바른 함
붉은 실로 묶었구나.

知予老境偏多睡
지여노경편다수

내 나이 들어
잠 많은 줄 알고서

乞與新芽摘火前
걸여신아적화전

한식 전 새 찻잎
보내 주었다네.


2.
官峻居卑莫我過
관준거비막아과

벼슬 높아도
가난한 삶 같은 처지

本無凡餉荒仙茶
본무범향황선다

끼니꺼리도 없는데
하물며 선차라니.

年年獨荷仁人貺
년년독하인인황

해마다 홀로
어진이의 덕 입으니

始作人間宰相家
시작인간재상가

이제야 이 사람
재상집 구실 하나보네.


餞 : 전별할 전, 보낼 전
糊 : 풀 호, 풀칠할 호
纏 : 얽힐 전, 묶을 전
絳 : 진홍 강
火前 : 한식
餉 : 건량 향


언젠가 崔忠獻(최충헌)의 후계자로 권력을 잡은 崔怡(최이)의 처남 鄭晏(정안)이,
八萬大藏經板刻(팔만대장경판각)을 지휘하느라 고향 河東(하동)에 머물면서,
花開茶(화개차)로 짐작되는 햇차를 선물로 보냈는데,
이를 받은 이규보는 이렇게 詩(시)를 지어 고마워했다.

차를 보냈던 정안은 南海分司大藏都監(남해분사대장도감)에서 팔만대장경을 완성,
뱃길로 강화도로 운반하여 고려 조정에 바쳤던 인물이었다.
이규보는 1241년 74세로 세상을 등졌고,
10년 뒤인 1251년 정안은 최이의 뒤를 이은 崔沆(최항)의 폭정을 비판하다가,
역적으로 몰려 모든 공적이 默殺(묵살)된 채 백령도앞에서 水葬(수장)되고 말았다.

출전 : 『동국이상국전집』 권 18




이규보(李奎報, 1168 ~ 1241)
본관은 황려(黃驪). 초명은 이인저(李仁氐), 자는 춘경(春卿), 호는 백운거사(白雲居士). 만년(晩年)에는 시·거문고·술을 좋아해 삼혹호선생(三酷好先生)이라고 불렸다.
고려 중기의 문관으로 어려서부터 시와 문장에 뛰어나 영웅서사시 동명왕편 등을 썼으며 벼슬에 임명될 때마다 즉흥시를 쓰기로 유명했다.
최씨 무신정권에 지나치게 아부를 한 부역자라는 평가도 있으나 벼슬살이를 하는 입장에서 현실적인 선택을 한 것으로 이해해주는 입장도 있다.
한국 문학사에 빼놓을 수 없는 걸출한 문인인 동시에, 몽고와의 외교에서도 큰 역할을 한 인물이다.
작품으로는 『동명왕편(東明王篇)』·『개원천보영사시(開元天寶詠史詩)』 등이었다. 그리고 문집으로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이 있다.